세종(世宗)과 음악가(音樂家)
세종(世宗)과 음악가(音樂家)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397년 4월 10일 이 땅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며,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이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지만 사냥과 주색에 몰두하여 태종의 신뢰를 점점 잃고 있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펼 후계자를 원했기에 방만한 행동을 일삼는 양녕대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양녕대군과 달리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어려서부터 인정 많고 성격이 곧은 데에다 독서를 좋아하여 태종을 늘 흡족하게 해주었다. 태종의 마음은 점점 충녕대군에게 쏠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왕세자 양녕대군의 어긋한 행동은 더 심해졌다. 게다가 그를 폐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까지 빗발치자 급기야 태종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겠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알고 있다." 잠시 조정은 술렁거렸지만 곧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1418년 6월 충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이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역사에 남을 기념비가 될 만한 굵직굵직한 일들은 척척 해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의 원형인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또한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인 농사가 잘 되도록 농사법 개량서적인 정초의 『농사직설(農事直說)』을 반포하고, 병들어 아파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의약서적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도 편찬했다. 당시 사회에 절실했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갔다. 그렇다고 세종이 일에만 몰두한 멋없는 임금은 아니었다.
그는 다양한 재주를 지녔고, 특히 ‘소리를 잘 식별하는 귀’를 타고난 훌륭한 음악가였다. 세종의 음악가적 면모는 여러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박연이 옥경(玉磬)을 올렸는데 임금께서 쳐서 소리를 듣고 말씀하시기를, ‘이칙(夷則)의 경쇠소리가 약간 높으니 몇 푼을 감하면 조화(調和)가 될 것이다.’ 하시므로, 박연이 가져다가 보니 경쇠공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임금의 말씀과 같았다."(세종 31년 12월) 박연이 새로 만든 편경을 세종 앞에서 시연하던 날의 이야기이다. 세종은 새 편경의 소리 중 이칙 음이 높다, 라며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음악전문가인 박연조차 미처 살피지 못했던 부분이 세종의 ‘예민한 귀’에 포착된 것이다. 세종은 아마도 음악 음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식별하는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나 보다. 음을 잘 식별하는 뛰어난 청음(聽音) 실력을 갖추었던 것이다. 이 뿐 아니라 세종은 직접 신악을 창제하고,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음악의 기보법인 ‘정간보’ 악보까지 창안했으니, 작곡가에 버금가는 그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신악(新樂)의 절주(節奏)는 모두 임금이 제정하였는데, 막대기를 짚고 땅을 치는 것으로 음절을 삼아 하루저녁에 제정하였다."(세종 31년 12월)
더 놀라운 것은 회례악을 만들 때의 일이다. "속악의 가사를 아악에 드러내어 그 성운이 조화되게 하고자 하면 다만 첩루(疊累)되는 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칠성(七聲) 이외의 소리도 또한 반드시 써야 된다. 이렇게 하면 음악으로써 결함됨이 있어 후세에 조소를 받게 될 것이다."(세종 14년 3월) 세종은 ‘속악 가사를 아악에 얹어 노래할 경우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속악 가사는 우리말 가사이며, 아악은 가사 한 음에 붙인 길이가 모두 동일했던 규격화된 다소 딱딱한 음악이다. 음절수가 길고 짧은 불규칙한 우리말 가사를 정사각형 같이 정형화된 아악의 틀로 노래할 경우 가사와 음악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음악'이 될까봐 염려하였다. 그는 문학텍스트(가사)와 음악텍스트(음악)의 구조적 차이에 대한 변별력을 지녔던 것이다. 가사와 선율의 조화로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세종은 훌륭한 ‘음악미학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종묘제사를 아악으로 지내는 관행에 대해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모르겠다."(세종 12년 9월)고 물은 것이라든지, "우리나라는 멀리 동쪽 변방에 있어 음악이 중국과 같지 않다"(세종 27년 9월)며 중국과 다른 우리 음악에 대한 변별력을 피력한 견해는 음악에 있어서도 ‘다르고 같음’의 차이와 범주를 인지했던 ‘음악평론가’로서의 안목을 충분히 입증한다.
한편 음악이론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아 신하들과 『율려신서』를 강독하여 그 이론을 꿰뚫은 후 실제 적용 여부를 판단하여 아악 정비의 이론적 틀까지 제시하였다. 탄탄한 음악지식에 기반한 ‘음악이론가’적 면모를 갖춘 ‘음악학자’인 것이다.
종합해 보면 세종은 작곡가, 음악미학가, 음악평론가, 음악이론가의 면모를 모두 갖춘 팔방미인이다. 약간의 음악성을 지닌 풍류객이 아니라 창작, 비평, 이론의 세 범위를 넘나들었던 뛰어난 음악 감각, 음악지성의 소유자이다. 세종 시대에 이룩된 엄청난 음악사업(아악 부흥, 악기 제작, 향악 창작, 정간보 창안 등)은 이렇듯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지닌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 인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전기 눈부신 음악문화를 빚어낸 장본인, 음악에 대한 감각·지식·통찰이 함께 빛을 발했던 보기 드문 천재 음악가,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