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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가얏고 2008. 4. 24. 00:15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모차르트가 음악사상, 아니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모차르트의 IQ를 역산해 측정한 결과 230 내지 250이라는 놀라운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이를 뒷받 침하는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14세 때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로마 교황청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시스틴 예배당에서의 일이다. 당시는 문외불출의 비곡(秘曲)이었던 알레그리 작곡<미제레레>라는 2부 9성(聲)의 11여 분 짜리 합창곡을 단 한 번 들었는데, 밖에 나와 기억만으로 정확히 사보 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하이든보다 24세나 연하였지만 35세에 요절했으니 서거 연도는 하이든보다 18년이나 앞선다. 그러나 정확히 35년 10개월이란 그의 수명도 그무렵 오스트리아 남자의 평균수명인 35세를 간신히 지킨 정도는 되어 결코 요절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들과 그에 못지 않게 음악적 재능이 비범했던 딸, 난넬의 신동 솜씨를 과시할 목적으로 모차르트가 6세 때부터 뮌헨, 빈 등지로 연주 여행을 했다. 모차르트는 빈의 궁전에서 11세의 어여쁜 마리 앙트와네트 앞에서 그녀의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천진한 모차르트는 자라서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 주위를 웃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5세, 6세 때부터 이미 모차르트는 피아노 곡을 작곡했고, 7세 때는 바이올린 소나타 몇 곡, 8세 때는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가 8세 때 작곡한 첫 번째 교향곡에는 현재 K-16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다. K란 쾨헬 번호의 악기로서, 쾨헬은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이자 모차르트 연구가였던 루드비히 쾨헬을 가리킨다. 그는 모차르트의 전 작품을 정리해 작품번호를 매겼다.

루이 왕조가 가장 화려했던 루이 15세 시대의 프랑스에서도 어린 모차르트는 국왕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음 해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역시 대 호평을 받았다.

13세부터 15세 봄까지 대망의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 명실공히 유럽 제1의 음악가로서 성장해 갔다.

프랑스 파리에서 익힌 우아한 로코코 스타일의 선율미와 그 무렵에 습득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고향 잘츠부르크 돌아온 15세의 모차르트는 마침 그곳을 찾아온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한편 독창적인 악성이나 기법도 더욱 무르익어가 바야흐로 대가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였던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이탈리아 음악가들에 심취해 모차르트의 음악을 과소 평가했으므로 그는 어머니와 더불어 다시 뮌헨, 만하임 등을 여행했다.

만하임에서 그는 가극 <마탄의 사수>의 작곡가 베버의 조카딸인 알로이자 베버를 만나 열려한 연애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고향의 아버지는 수업 중인 녀석이 무슨 연애냐며 모차르트를 당장 파리로 가도록 명했다.

어렸을 때는 그토록 그를 반겼던 파리였건만 성인이 된 모차르트에게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으며, 설상 가상으로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알로이자를 찾았으나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를 연모하고 있지 않은가. 이중삼중으로 상심한 모차르트는 패전장군처럼 귀향했다.

결국 모차르트는 자신을 끝까지 따랐던 알로이자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을 한다. 흔히 전지작가들은 콘스탄체를 낭비벽이 심한 악처라고 묘사하지만, 모차르트가 마지막 10년간을 빈에서 같이 보내면서 갖가지 역경을 버텨 나갈 수 있던 것은, 오로지 아내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라 평가하여 요사이는 그녀를 좋은 아내로 재평가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원래 예술가 기질이 짙은 사람으로서 권력에 아부하는 따위의 처세술의 전혀 없어, 주위 사람들이 하느님처럼 떠받들던 대주교와 한바탕 싸우고 급기야는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것이 25세 때의 일이었다.

굳은 결심을 안고 빈으로 돌아 간 그는 음악가로서 독립된 길을 걸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당시의 사회 사정이 그것을 혀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빈에서는 이탈리아 작곡가 살리에리라는 라이벌이 있어 불세출의 대천재가 빈에 등장하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온갖 중상모략과 방해공작을 서슴지 않았다.

극도의 빈곤 속에서 허덕이면서 모차르트가 그토록 수많은 걸작들을 계속 써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역시 아내 콘스탄체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글쎄, 추운 겨울, 땔감이 떨어져 아내와 그가 꼭 끌어안고 밤새 춤을 추며 혹한을 견디었다는 가슴 뭉클한 일화도 전해지고 보면 그렇다. ^^

모차르트의 죽음이 라이벌 살리에리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설도 이제까지는 파다했지만 현재는 그 설을 부정하는 쪽이 더 우세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부정하는 쪽의 설득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설득이 없지 않은가?


1791년 여름, 잿빛 망토로 온몸을 휘감고 키 크고 깡마른 한 사내가 모차르트를 찾아왔다. 왠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사내는 죽은 이에게 바치는 <진혼곡>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모차르트는 몹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면서도 비상한 정열을 기울여 그 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끝내 완성을 못 보고 그 해 12월 5일 생을 마감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말할 수 없이 수려하며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을 노래한다. 즐거운 가락 속에도 한가닥 애수를 품고 있을뿐만 아니라, 문득 문득 여성적으로 느껴지는 애잔함과 여린 선율들 하며, 돌연 돌진하여 전장에 나가는 기사인 양 결연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생애는 길지 않았지만, 짧았을 망정 그가 몸소 격은 고난에 에 찬 인생의 기록이라기도 한 듯하다. 그의 음악을 가리켜 오늘날 음악 애호가들의 평은 명암의 양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살아 있는 음악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 신이 내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