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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의 생애와 업적

가얏고 2018. 10. 14. 15:59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 자료 정리의 한계상, 기술된 본문의 전체 또는 일부 내용이 실제 사실, 관련 기록 등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조선시대 인물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세종대왕(世宗大王:1397-1450) 아니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을 꼽는다. 범위를 조선시대만으로 국한하지 않고 한민족 전체로 확대하더라도 그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 바로 성웅(聖雄)이라 불리는 이순신 장군인 것이다. 혹자는 지난날 군사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추앙된 위인이라는 이유로 역사의 평가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원균(元均:1540-1597)의 처지와 비교하면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권을 차지한 세력에 의해 실제 이상으로 추대되었다고도 하지만, 그런 말들은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조금만 자료를 찾아보고 사료(史料)를 대조해 보면 한낱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다. 과연 충무공 이순신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유사(有史) 이래 민족 최고의 명장(名將)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것일까?


이순신은 본관이 덕수(德水), 자(字)가 여해(汝諧)로, 1545년(인조1) 3월 초8일(양력 4월 28일)에 한성부 건천동(乾川洞:현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부(父)는 증의정부좌의정 덕연군(德淵君) 이정(李貞), 모(母)는 증정경부인 초계(草溪) 변씨(邊氏)이며, 형제는 셋인데 위로 희신(羲臣)과 요신(堯臣), 아래로 우신(禹臣)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같은 동네에서 자란 유성룡(柳成龍:1542~1607)과 절친하게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8세가 되던 1552년(명종7)에 본가가 있던 충청도 아산(牙山) 백암리(白巖里)로 이사한 후, 21세이던 1565년(명종20)에 전보성군수 방진(方震)의 딸 상주(尙州) 방씨와 혼인했다. 혼인한 이듬해 10월에 그간 정진하던 문과(文科) 학업을 중지하고 무관(武官)이 되기 위한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형(희신과 요신)을 따라 유학(儒學)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무인이 되고 싶어했다. 22세 되던 해 겨울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팔심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에 동료들이 따를 자가 없었다." -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이충무공전서)' 행록(行錄)1. 이순신의 조카, 정랑(正郞) 이분(李芬) 찬(撰)

28세이던 1572년(선조5)에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낙방했으며, 4년 후인 무과 학업 10년째가 되는 1576년(선조9) 2월에 병자식년(丙子式年:병자년 정기)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등위는 병과(丙科) 제4인(第四人)으로 해당 무과의 전체 급제자 29명 가운데 12등이었다. 그러나 그 29명 중에 전현직 관리가 26명이나 되었으므로 등수가 크게 낮았던 것은 아니였다. 급제자 평균 연령은 이순신의 나이보다 2살 많은 34세. 과거 급제 후 수습직인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를 거쳐, 그 해 12월에 첫 정식 관직인 종9품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임명되어 함경도 국경 지역에 부임하였으며, 이후 종8품 훈련원봉사, 충청도병마절도사의 군관(軍官:개인 참모) 등을 역임했다.

1580년(선조13) 7월에 일약 승진하여 전라좌수영의 종4품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는데, 1582년 1월에 조정에서 파견된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무기검열관) 서익(徐益:1542-1587)의 보고로 인해 파직되었다. 무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실제는 이순신이 훈련원봉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병조정랑으로 있던 서익 자신의 (인사와 관련된 부당한) 지시를 들어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발포만호로 있을 때 상관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성박(成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진 영내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고 명령한 결과 일어났던 사건(이순신이 '관물(官物)' 즉 나라의 재물이라며 거절한 일)은 익히 알려져 있다.

파직된 해 5월에 훈련원봉사가 되었으며, 잠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용(李용)의 군관으로 있다가 10월에 종9품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이 되었다. 권관이 된 직후 여진족 추장 울지내(鬱只乃)를 소탕했으나, 임의 출병이라 하여 공적이 유야무야 되었다. 11월에 정7품 훈련원참군에 임명되었는데, 곧 부친상(喪)이 났으므로 관직을 떠났다.

3년상을 마친 후, 1586년(선조19) 1월에 종6품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동월에 종4품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고, 이듬해에는 조산보 인근의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했다. 겸임한 해 가을에 여진족 마니응개(마尼應介)가 무리를 이끌고 대거 녹둔도를 침입하여 10여 명의 조선군 전사자를 비롯한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함경북도병마절도사였던 이일(李鎰:1538-1601)이 (이순신의 병력 보충 요청을 묵살한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이순신을 적극 모함했으므로 백의종군(白衣從軍)에 처해졌으나, 익년 1월의 시전부락(時錢部落) 전투에서 공을 세워 신분을 회복했다. 그 해 윤6월에 집으로 돌아가 쉬었으며, 이듬해 1월에 비변사의 불차채용(不次採用:발탁등용) 대상자 명단에 들었다.

 

"충무공 이순신 같은 이는 거의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 뒤의 일인자인 격인데, 그가 영락(零落:출사 전 또는 1582년 파직)하였을 때를 당하여 동종(同宗:같은 본관)으로서의 친밀함이 겹쳐 있고 거기에 본병(本兵:인사권자)의 권한까지 겸하고 있던 현명한 선정(先正) 이문성(李文成:율곡 이이)이 그를 구하였지만 만나볼 수 없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관찰하여도 뒷날의 전공 수립을 추측하기에 충분합니다." - 1797년(정조21) 윤6월 6일(갑자), 의정부우의정 이병모(李秉模:1742-1806)

이어 2월에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1541-1607)의 군관을 거쳐, 12월에 종6품의 정읍현감(井邑縣監)이 되었다. 현감으로 부임한 다음해인 1590년(선조22) 7월과 8월에 이순신을 종3품인 고사리진(高沙里鎭)과 만포진(滿浦鎭)의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임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조정 신하들의 반대로 곧 무산되었다. 종6품 현감을 갑자기 종3품으로 품계를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것이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의 반대 이유였다(조선시대 관직은 매우 엄격하고 신중하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품계를 몇 단계씩 뛰어 넘어 관직을 제수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이 평상시와 달랐으므로 '인재'라고 평가되는 무관들을 각급 요충지에 배치하는 등의 최소한의 전쟁 대비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순신도 1591년 2월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발탁 임명된다. 당시 조정 논의를 보면,

+ 1591년(선조24) 2월 16일(계미), 선조실록.
진도군수 이순신을 초자(超資:자급을 뛰어)하여 전라좌수사에 제수하라는 (2월) 13일 전교에 대해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진도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뛰어 제수)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官爵:관직과 품계)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遞差:교체)시키소서."
하니, (임금께서) 답하시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과인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常規:일반 규례)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부족하므로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쟁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셨다.

+ 1591년(선조24) 2월 18일(을유), 선조실록.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많은 사람의 기대)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수군절도사)에 승진 임명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속히 체차하소서. (후략)"
하니, 답하시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어찌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후략)"
하였다.

과 같았다. 2월에 종4품 진도군수로 임명하는 사령장이 발급되었는데 미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수군첨절제사(加里浦水軍僉節制使)로, 이어 13일에는 무반 정3품 당상관직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품계나 관직 임명은 조선시대 내내 특히 엄중하게 시행되었으므로 전혀 논란이 없지는 않았으나, 비변사(備邊司) 실무관들의 동의와 선조(宣祖) 임금의 강경한 뜻에 따라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건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기까지 약 14개월간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나서게 된다. 실제로 1592년(선조25) 3월 27일과 전쟁 발발 하루 전인 4월 12일에 거북선(龜船)에서 포(砲) 쏘는 시험을 한 것으로 '난중일기(亂中日記)' 기록은 전하고 있다.

"27일(정해). 맑고 바람이 없었다. 아침을 일찍 먹은 후, 배를 타고 소포(召浦:여수 동쪽 경포)에 이르러 쇠사슬을 가로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며 종일토록 기둥 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放砲)을 시험하였다."

"12일(신축). 맑음.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 포와 현자 포(地玄字砲)를 쏘았다. 순찰사(巡使:전라관찰사 이광)의 군관 남공(南公:南간)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옮겨 활 10순(巡)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가며 노대석(路臺石:말에서 타고 내릴 때 쓰는 돌)을 보았다." - 1592년(선조25) 3월 27일(정해)과 4월 12일(신축), '난중일기' 임진(壬辰) 이순신

 

1592년은 갑자(甲子)로 '임진(壬辰)'이다. 이해 4월 13일에 일본군의 부산진(釜山鎭) 상륙과 점령을 시작으로 장장 7년간에 걸친 전쟁이 개시되었다. 개전 소식이 전라좌수영에 전해진 때가 15일 술시(戌時:19-21시), 이순신은 곧바로 조정에 장계(因倭警待變狀)를 올리고 이웃한 전라관찰사 이광, 전라병사 최원(崔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1561-1597), 경상우병사 김성일(金誠一:1538-1593), 경상좌수사 박홍(朴泓:1534-1593), 경상우수사 원균(元均:1540-1597) 등과 관련 공문을 주고 받았다. 26일에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主將)의 호령에 맡긴다.'는 좌부승지 민준(閔濬:1532-1613)의 서장(書狀)을 접수하였다. 익일 선전관 조명(趙銘)이 전한 명령도 같은 내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관할 영내를 넘어 출전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출전 예정일은 선조 임금이 도읍지 한양(漢陽)을 버리고 파천(播遷)을 떠난 4월 30일이었으나 전라우수영의 합류가 늦어져 다음달 5월 4일에 비로소 출전했다.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등 86척으로 구성된 전라좌수영 함대가 6일에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함대(판옥선 4척, 협선 2척)와 만나 함대를 구성, 7일 옥포(玉浦)에서 일본군 26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날 합포(合浦)에서 5척, 다음 8일에 적진포(赤珍浦)에서 11척을 추가 격파하였으니(조선군 전함 피해 전무), 이것이 이른 바 '삼가 적을 무찌른 일을 아뢰옵니다.'로 시작되는 조선군의 승전 제1보 장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의 시작이었다(제1차 출전).

이순신은 이 옥포해전의 공적으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이후 사천(泗川)에서 13척, 당포(唐浦)에서 21척, 당항포(唐項浦)에서 26척, 율포(栗浦)에서 7척을 격파하는 등의 큰 전과를 올려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階:승급)되었다(이상 제2차 출전). 그리고 7월 8일에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大捷)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그 이름도 유명한 한산도(閑山島) 해전에서 일본군 70여 척을 맞이해 학익진(鶴翼陣)으로 56척 이상을 격침하는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는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이 합심한 결과로, 이 공적으로 인해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 이 달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서 20여 척(이상 제3차 출전), 9월 1일에 부산포(釜山浦)에서 100여 척을 깨트려(제4차 출전) 조선군의 재해권 완전 장악은 불변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고 남해와 서해를 경유해 군량과 병력을 최전선으로 수송하려는 일본군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1593년(선조26) 2월과 3월에 웅포(熊浦:웅천) 일대에서 소규모 접전이 있었으나, 임진년 이후 해상 전세는 비교적 조용했다. 일본군이 극도의 저자세를 보여 일체 바다로 나와 응전하지 않았고 조선 수군 또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함부로 일본군 밀집 지역으로 진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군과 수군이 함께 병진(竝進)해야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는데, 당시 육군 전력이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선 수군 지휘관의 위계(관품)가 동일해 이들의 의견을 조정할 상급자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원활한 작전 지휘를 위해 충청, 경상, 전라의 3도 수군을 아우르는 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忠淸全羅慶尙三道水軍統制使) 직책을 신설, 1593년 8월에 이순신에게 겸직을 명했다(임명 교서를 받은 것은 10월 1일?). 통제사 이순신이 된 것이다.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密旨:비밀리에 내린 어명)가 들어왔는데 '수륙(水陸)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이고 한 가지 계책이라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지만, 3년이나 해상에 있어 그럴 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으로 날을 보내지만,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소굴(窟) 속에 있는 적이라 경솔하게 나아가 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己知彼 百戰不殆).'고 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는데, 국사(國事)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널 방책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겠는가." - 1594년(선조27) 9월 3일(무인), '난중일기' 갑오(甲午) 9월 초3일 이순신

1594년(선조27) 3월 4일에 제2차 당항포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군 30여 척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는 적이 소극적으로 일관하던 중에 이룩한 통제사 부임 이후 최대 전과였다. 9월과 10월에 장문포(長門浦), 영등포(永登浦) 등에서 접전이 있었으나 전과는 크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강화회담이 열리고 명(明)과 일본 사이에 가짜 항복문서와 책봉사가 오가는 등, 1595년(선조28)이 되면서 사실상 휴전(休戰) 상황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명군(明軍)과 일본군도 상당수 철군하거나 점령한 땅을 지키기 위한 수성(守城) 진지 구축에 몰입했다. 이렇게 약 3년간의 잠잠하던 기간이 지나 다시 전쟁이 속개된 것은 1597년(선조30) 2월이었다. 임진왜란 제2회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의 계략과 조선 조정의 판단 착오, 신하들 사이의 내분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1월말에 이순신은 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된다. 일본군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이 (자신은 전쟁 재발에 반대한다면서) '화친이 성립하지 못한 것은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때문이니, 모일(某日)에 바다를 건너 상륙하려 할 때 수전(水戰)을 잘 하는 조선 수군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공격하라.'는 거짓 첩보를 조선측에 흘린 것이다. 이를 입수한 조전 조정에서 좋은 정보라고 여겨 이순신을 독려했으나 통제사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았다. 상륙지라고 알려진 서생포(西生浦)는 지금의 울산(蔚山) 지역으로 부산포를 경유해야 도달할 수 있는 원거리인 관계로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적의 첩보를 그대로 믿고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출전에 응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여기에 기망(欺罔) 장계 문제와 원균을 무고한 혐의가 추가된 결과, 선조 임금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전라도병마절도사 원균을 후임 삼도통제사 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하게 된다.

이순신은 3월 4일에 하옥되고 12일에 형문(刑問)을 받았으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탁(鄭琢:1526-1605) 등의 변호로 사형죄에서 감(減)해져 4월 1일에 생애 두 번째 백의종군형에 처해졌다. 이 달 11일에 모친상이 있었지만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1537-1599)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7월 14일 출전한 원균이 동월 15일과 16일에 벌어진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문자 그대로 '대패(大敗)'하자 조정에서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삼도통제사로 삼았다. 진주 정개산성(鼎蓋山城)에서 백의종군 도중에 7월 22일자 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받은 8월 3일 당일로 길을 떠나 수군이 머물고 있던 장흥 회령포(會寧浦)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때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고작 12척. 때문에 조정 안에서 차제에 수군을 폐지해 그 병력을 육군으로 전환하자는 의견 개진이 있었는데,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수군 전력 유지를 강력 주장하였으므로 수군 폐지론은 없던 일이 되었다.

"임진년부터 5, 6년에 이르는 동안 적이 감히 양호(兩湖:충청과 전라) 지방에 쳐들어 오지 못한 것은 주사(舟師:수군)로 그 바닷길을 막아낸 때문이옵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사옵니다. 이제 만일 주사를 모두 폐지하신다면 이는 적이 다행하게 여기는 바일 것이며, 호남 해안으로부터 한강까지 일격에 진격할 것인 즉, 이는 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고 하더라도 미신(微臣:미미한 신)이 죽지 아니한 즉, 적이 감히 우리를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 1597년(선조30) 9월, 이순신의 장계

[原文] 自壬辰至于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扼其路也,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之所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겨 전열을 가다듬은 이순신은 13척(12척+1척 후속) 전선을 이끌고 출전,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일본군 200여 척을 맞이해 그 중 31척 격파하고 수십 척에 피해를 입히는 승리를 달성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함에 따라 일본군의 남해-서해를 잇는 진공 계획은 재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임진왜란 일화(逸話)에, 선조가 이순신을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려주려 하자, 신하들이 "순신의 작질(爵秩:품계)이 이미 높습니다. 이제 또 다시 올려 주면 추후 다시 승전할 때 장차 무엇으로써 상(賞)을 주시려고 하시옵니까."라는 말로 반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임금을 호송하거나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한 문관 신하들의 승진에는 거칠 것이 없었지만, 무관 장수들에 대한 승진과 포상에는 매우 냉정했던 것이 당시 조정 풍토였다. 아니 조선시대 전반이 그러했는데, 이는 전후 책봉된 공신(功臣) 규모, 문무관 비율만 헤아려 봐도 알 수 있다.

시간은 흘러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31). 수군 전력을 점차 강화한 이순신은 7월 16일에 고금도(古今島), 9월과 10월에 왜교성(倭橋城) 일대 해역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으며, 최후 후퇴를 감행하던 일본군 본진을 격멸하기 위해 11월 9일 함대를 출전시켰다. 그리고 19일에 벌어진 해전에서 일본군이 발사한 유탄을 맞은 이순신은 전사(戰死)로서 생을 마감한다(향년 54세). 노량(露梁) 해전에서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순절하고 만 것이다. 순절한 이듬해 2월 아산 금성산(錦城山) 아래 안장하였으며, 1614년(광해6) 10월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이장하였다. 1601년(선조34)에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麗水)에 이순신을 배향하기 위한 사당이 세워지고 선조로부터 충민사(忠愍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와 아산 현충사(顯忠祠)도 1663년(현종4)과 1707년(숙종23)에 각각 사액되었다.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비석에 새긴 글)을 읽었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 순절(殉節)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중국 남송의 명장)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能)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백의종군)을 받기에 이르렀고, 결국에는 원균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큰 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 1659년(효종10) 윤3월 30일(경인), 효종(孝宗)

순절한 해 12월에 정1품 의정부우의정으로 증직되고(품계는 불명), 1604년(선조37)에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이어 7월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이 가증(加贈:추가 추증)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追封)되었다. 친공신(親功臣:스스로 공적으로 공신이 된 사람)에게 주도록 되어 있던 시호(諡號)가 내려진 것은 순절한 지 무려 45년이 지난 1643년(인조21) 3월이었다.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였는데,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 것을 '충(忠:危身奉上)',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은 것을 '무(武:折衝禦侮)'라 하였다. 최고 관직인 영의정이 가증된 것은, 사후 200년 가까이 지난 1793년(정조17) 7월 21일이었으며, 문집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가 완성 간행된 것은 1795년(정조19) 9월 14일이었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연합 작전을 수행한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은 이순신을 평하여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재주와 나라를 바로 세운 큰 공이 있다(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고 말하였으며, 이순신이 쌓은 전공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해 신종(神宗) 황제가 명 관직인 '수군도독'의 도독인(都督印:관인)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하사하기도 했다. 선조실록 권161. 선조36년 4월 21일 정미조에도 사평(史評)으로 '이순신은 재질과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 중국 사람들도 명장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그 때에도 명장으로 두루 칭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순수 무신(武臣)으로는 극히 드물게,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저명한 유현(儒賢)에게만 붙여 사용되던 '선정(先正)'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순신을 명장이라 말하는 근거에는,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그 결과 일본군의 진공 기도를 완전 분쇄시켰으며(일본군 손실 500척 이상, 조선군 전투손실 0척), 2차례 백의종군으로 대표되는 안팎의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오로지 충(忠)으로 매사 대처하였을 뿐 아니라, 인품과 덕(德)으로 동료 장수와 백성들을 화합해 잘 이끌었다는 것 등이 있다. 특히, 일본군의 전략과 전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한산도 해전과 12척 전선을 지휘해 결사적으로 싸웠던 명랑 해전에서 이룩한 '불멸의 공적'이 빛을 발하는데, 과연 이러한 승리가 없었더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참고로, 전쟁 초반의 자침(自沈)을 제외한 임진왜란 전기간의 조선 수군 손실은 120척 가량이었는데, 이 가운데 이순신 장군 지휘하에서 발생했던 손실은 비전투손실 2척에 불과했다(대부분 피해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하던 기간에 발생했다.).

"조정에서 현재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충신(忠臣)으로 드러나 칭송할 만한 이는 고(故) 통제사 이순신만한 이가 없는데도, 묘소에 아직까지 조그만 표석(表石)조차도 없습니다. 이는 자손들이 미약한 소치이니, 조정에서 본도(本道:충청도)로 하여금 세우게 한다면 풍성(風聲:품격과 명성)을 수립하는 도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1658년(효종9) 6월 11일(정축), 영돈녕부사 김육(金堉:1580-1658)

 

 

충무공 이순신 장군 품계 및 관직 연보

연도

품계

관직

비고

연호

1545

03

08

-

-

한성부 건천동 출생

인종01

01

1576

02

?

정9품 효력부위

종8품 권지훈련원봉사 (수습직)

무과 병과 제4인 급제

선조09

32

12

?

종9품 동구비보권관

 

1579

02

?

?

종8품 훈련원봉사

 

선조12

35

12

?

?

충청도병마절도사 군관

 

1580

07

?

?

종4품 발포진수군만호

6월?

선조13

36

1582

01

?

?

파직

파직

선조15

38

05

?

?

종8품 훈련원봉사

 

1583

07

?

?

함경남도병마절도사 군관

함경남병사 이용

선조16

39

10

?

?

종9품 건원보권관

여진족 추장 울지내 포획

11

?

?

정7품 훈련원참군

동월 15일 부친상

1586

01

?

?

종6품 사복시주부

동월 종4품 조산보만호 임명

선조19

42

1587

?

?

?

종4품 조산보만호 겸녹둔도둔전관

녹둔도둔전관 겸임

선조20

43

08

?

?

삭직?

제1차 백의종군 (견책성?)

1589

02

?

?

전라도순찰사 군관

전라순찰사 이광, 조방장 겸임

선조22

45

11

?

?

겸선전관

선전관 겸임 (본직은?)

12

?

?

종6품 정읍현감

 

1590

07

?

?

종3품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

임명 취소

선조23

46

08

?

?

종3품 만포진첨절제사

임명 취소

1591

?

?

정3품 절충장군

 

 

선조24

47

02

?

겸 태인현감

종6품 태인현감 겸임

?

종4품 진도군수

임명 취소

?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

임명 취소

13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2일?

1592

05

24

종2품 가선대부

옥포 해전 전공

선조25

48

08

16

정2품 자헌대부

당항포 해전 전공

?

?

정2품 정헌대부

한산도 해전 전공

1593

08

15

겸삼도수군통제사

종2품급 삼도수군통제사 겸임

선조26

49

1597

01

28

겸전라충청도수군통제사 (취소)

겸경상도통제사에 원균 (취소)

선조30

53

02

01

 

파직?

2월 6일?

03

04

 

-

하옥 (압송은 2월 16일? 17일?)

04

01

?

삭직?

제2차 백의종군

07

22

정2품 정헌대부

전라좌수사 겸삼도수군통제사

23일?

1598

11

19

전사

선조31

54

12

04

?

정1품 의정부우의정 (증직)

대광보국숭록대부? 보국숭록대부?

1604

06

25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 추봉

선조37

 

07

12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정1품 의정부좌의정 (가증)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추봉

 

1643

03

28

시호 충무(忠武)

인조21

 

1793

07

21

정1품 의정부영의정 (가증)

 

정조17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다.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덕풍부원군 행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삼도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영의정을 가증하라." - 1793년(정조17) 7월 21일(임자), 정조(正祖)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주요 장수 (공신 항목에서 원종은 선무원종공신)

이름

생몰

주요 관직(임진)

최종 품계

최종(최고) 관직

공신

봉군

중시

증직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정3품 전라좌수사

정2품 정헌

종2품 삼도통제사

선무1등

덕풍부원군

忠武

정1품 영의정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정3품 전라우수사

?

-

선무2등

완흥군

毅愍

정2품 병조판서

박홍(朴泓)

1534-1593

정3품 경상좌수사

?

우위대장

원종1등

-

-

정2품 병조판서

원균(元均)

1540-1597

정3품 경상우수사

정2품 자헌?

종2품 삼도통제사

선무1등

원릉군

-

종1품 좌찬성

구사직(具思稷)

?-?

종3품 가리포첨사

?

종2품 충청병사

원종?

-

-

?

권준(權俊)

?-?

종3품 순천부사

?

종2품 황해병사

선무3등

안창군

-

?

이순신(李純信)

1554-1611

종3품 방답첨사

종2품 가의?

종2품 전라병사

선무3등

완천군

武毅 

종1품 좌찬성

선거이(宣居怡)

1550-1598

종4품 진도군수

?

종2품 황해병사

원종1등

-

-

?

신호(申浩)

1539-1597

종4품 낙안군수

정3품 통정?

교룡산성수어사

원종1등

-

武壯

정2품 형조판서

우치적(禹致績)

?-1628

종4품 영등포만호

종2품 가선?

종2품 함경북병사

원종?

-

-

-

이영남(李英男)

?-1598

종4품 율포만호

?

종3품 가리포첨사

원종?

-

-

종2품 병조참판

이운룡(李雲龍)

1562-1610

종4품 옥포만호

?

종2품 삼도통제사

선무3등

식성군

-

정2품 병조판서

정운(鄭運)

1543-1592

종4품 녹도만호

정3품 절충

-

원종?

-

忠壯

정2품 병조판서

기효근(奇孝謹)

1542-1597

종5품 남해현령

정3품 통정

-

선무3등

개백군

-

정2품 병조판서

배흥립(裵興立)

1546-1608

종6품 흥양현감

종2품 가의?

종2품 충청병사

원종?

-

孝肅

?

어영담(魚泳潭)

?-1594

종6품 광양현감

정3품 절충

종3품 방답첨사

원종?

-

-

?

김인영(金仁英)

?-?

종9품 여도권관

?

종3품 훈련원부정

원종?

-

-

-

정걸(丁傑)

?-?

조방장

?

종3품 충청수사?

원종?등

-

-

?

송희립(宋希立)

1553-1623

군관

?

정3품 전라좌수사

원종?

-

-

-

이언량(李彦良)

?-1601

군관

?

종4품 군수?

원종1등

-

-

?

 

 

 

 

 

 

 

 

 

 

 

역사상 시호 '충무(忠武)'를 받은 인물

이름

생몰

주요 관직

충(忠)

무(武)

증시

증직

조문주(趙文柱)

?-1269

종3품 대장군?

?

?

?

-

조영무(趙英茂)

?-1414

정1품 우의정

?

?

1414년(태종14)

-

남이(南怡)

1441-1468

정2품 병조판서

?

?

1910년(융희4)?

-

이준(李浚)

1441-1479

정1품 영의정

?

?

?

-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종2품 삼도통제사

위신봉상(危身奉上)

절충어모(折衝禦侮)

1643년(인조21)

정1품 영의정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종2품 경상우병사

?

?

1711년(숙종37)

정1품 영의정

이수일(李守一)

1554-1632

종2품 평안병사

?

?

?

정1품 좌의정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종2품 경상병사

?

?

1685년(숙종11)

-

구인후(具仁후)

1578-1658

정1품 좌의정

?

?

1659년(효종10)

-

김응하(金應河)

1580-1619

종4품 삼수군수

?

?

1670년(현종11)

정1품 영의정

이하 불분명 (근거 없음)

박병묵(朴炳默)

?-?(고려)

 

 

 

 

 

장일성(張日成)

?-?(고려)

 

 

 

 

 

정득운(程得雲)

?-?(임란)

종6품 의흥위부장

 

 

 

 

정득원(程得元)

?-?(임란)

종6품 의흥위부장

 

 

 

 

주원부(朱原富)

?-?

 

 

 

 

 

지용수(池龍壽)

?-?(고려)

 

 

 

 

 

 

"문묘(文廟)에 우리나라 선현(先賢)을 많이 종향(從享)하였는데, 봄과 가을의 석전(釋奠)에 관원을 차견(差遣:파견)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개 그 소중함이 성묘(聖廟:문묘)에 있기 때문입니다. 2품 이상 무신(武臣)으로 조용(調用:등용)되었다가 졸(卒:사망)하였을 경우에도 또한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제사)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 없던 것이니 비록 사묘(祠廟:사당)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제사)라고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정도에 지나친 일은 아닐 것입니다." - 1710년(숙종36) 12월 17일(정축),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이命:1658-1722)

http://cafe.daum.net/107ROTC16



2015.01.30. 05:10






   李舜臣
   생몰년도 : 1545년(인종 1)-1598년(선조 31)
   자 : 여해(汝諧)
   시호 ; 충무(忠武)
   활동분야 : 군사
   다른 이름 : 충무공

   생애와 업적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발대 1만7,000여 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에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거쳐 함경도로 올라왔다.

 왕이 랴오둥으로 피신할 생각을 할 만큼 전황은 어두웠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이 같은 참패와 달리 바다에서는 조선의 수군이 연전연승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전라좌수사로 특진된 이순신의 활약 덕분이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순신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활약을 보이지 않았다.

 1545년(인종 1)에 태어난 그는 1576년 서른두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식년시 무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결벽에 가까운 강직성,

  타협 없는 원칙적인 자세 때문에 승진도 늦고 주위의 모함과 견제도 많이 받았다.

 한 번은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이이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지만,

“이 판서께서는 나와 동성동본의 웃어른이므로 내가 먼저 찾아 뵈어야 도리이지만,

  그분께서 최고 인사권자로 있는 지금,굳이 만나는 것은 서로 누가될 뿐이다”며

 만나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여진족의 침입에 대한 책임을 덮어써

  삭탈관직 당하고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하는등 모함과 시련을 받으며

  10여 년의 고단한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성실하고 반듯한 자세가 차츰 인정을 받았고,

 또 죽마고우였던 유성룡의 강력한 추천으로 복직되어 정읍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일약 전라좌수사로 천거되었다.

 이렇게 운명처럼 임진왜란 1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이순신은 부임한 뒤

  군대의 기강을 세우고 군비를 강화해

  1년 뒤에는 40척의 크고 작은 전선을 보유한 강력한 수군을 양성했다.

 부산 앞바다에 왜군이 들이닥치자

  이순신은 경상우수군과 연합해 옥포•합포 등지에서 40여 척의 적선을 대파했고,

  이후 군비를 재정비하여 사천•당포•당항포•율포 등의 해전에서 적선 70여 척을 격파했으며,

  전라좌•우수군,경상우수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한 뒤에는 7월 8일 한산도대첩.

  9월 1일 부산포대첩을 거두는 등 일본 수군을 거의 전멸 상태에 빠뜨렸다.

 이러한 이순신의 승리에 물론 거북선이 기여한 바 크지만,

  당시 조선 수군의 배가 모두 거북선이었던 것도 아니고

  또 거북선을 처음 만든 것이 이순신이라는 우리의 상식도 잘못된 것이다.

 입에서 불을 뿜는 철갑의 거북선에 이순신 장군이 타고서 적을 무찌르는 장면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우선 거북선은 철갑이 아닌 판자로 덮인 돌격선으로

  입에서는 유황의 불이 아니라 포를 쏘았다.

 또한 본진이 아니라 맨 앞에 나서야 하는 돌격선이다 보니

  대장인 이순신이 탈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세 척에서 많아야 다섯 척 정도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또한 거북선을 새로 정비하고 개발한 공은 분명 이순신과 부하들에게 있지만,

  거북선이라는 배가 있었다는 사실은《태종실록》에 이미 나온다.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위를 판자로 덮고 그곳에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십자형 길을 제외하고는 칼과 송곳을 꽂아 적들이 발붙일 수 없도록 했으며,

  앞의 용머리와 뒤의 꼬리에 총 구멍을 내고 좌우에도 각각 6개의 총 구멍을 낸 모양으로,

  적을 만나 싸울 때는 맨 앞에서 적선을 들이받는 충돌 작전에 사용됐다.

 좌우 전후에서 총을 쏘고 또한 적이 배에 오를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으니

  크고 작은 해전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이 승전을 거듭하며 해상을 장악하자.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여 조선을 점령하려던 일본의 전략은 무력화되었다.

 또 이 무렵에는 조선군이 육전에 있어서도 수세에서 공세로 전세를 전환시키고 있었고,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까지 도착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왜군은 강화협상을 제의해왔다.

 조선의 완강한 반대에도 명군은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측의 조건이 너무 달라 시간만 끌던 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고 다시 일본의 수군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순간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였던 이순신은 감옥에 갇히고 만다.

 도대체 그때 조정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적장 고니시유기나가(小西行長)가 보낸 밀서였다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 올 것이라며

  이를 막으라고 알려주었다.

 주전논자인 가토가 조선 땅에 상륙하기 전에 이순신의 수군으로 무찌른다면

  또 다른 전쟁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정보가 가짜가 아닐까 조정은 긴장했지만

  선조는 이 정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가토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고니시의 정보가 ‘간사한 속임수”라고 의심한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가토는 조선에 무사히 상륙했다.

 이것이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결국 왕의 명령을 거역한 이순신은 감옥에 갇히고 원균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원균은 부산포의 적 본영을 공격하러 출진했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게 대패하고,

  당황한 선조는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이순신이 돌아와 보니 그 동안 피땀으로 육성해온 군사와 배는 간 곳이 없었다.

 원균의 패전으로 수군은 거의 전멸했고 열두 척의 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정에서도 실상을 파악한 뒤 수군이 너무나 미약하니

  육군으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할 정도였다.

 이에 이순신은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아직도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배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비장한 장계를 올린다.

 먼저 이순신은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라도 내륙지방을 순회하며 병사를 모으고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그 해 9월 왜군 수백 척이 또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열두 척의 배와 수리 중이던 한 척을 합쳐 열세 척의 배를 이끌고 출전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선택한 장소는 명랑해협이었다.

 ‘울돌목’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은 조류가 빠른데다 지형이 좁아

  130여 척이 넘는 적선은 행동이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130여 척의 대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조선의 장수나 군사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도망갈 궁리만 했다.

 이순신은 겹겹이 포위한 적선 사이를 뚫고 손수 활을 쏘고 기를 흔들며 이들을 독려했다.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대장선을 비롯한 왜선 31척을 격파하고

   나머지는 먼 바다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

 열세 척의 배가 130여 척의 배를 물리친,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승리이다.

 이 승리로 정유재란은 또 다른 전기를 맞는다.

 수륙양공 이라는 왜군의 전략이 또다시 좌절된 것이다.

 명량대첩 이후 목포 근처 고하도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1597년 고금도로 진을 옮길 무렵에는 군사도 8,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전선도 여러 척 마련해 군세를 거윈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 구원군으로 온 수군제독 진린이 욕심도 많고 포악하여 골칫거리였으나

  이순신은 그를 감복시켜 명나라 수군의 지휘권도 장악했다.

 그러다 그 해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철병하기 시작했다.

 왜군에게 뇌물을 받은 진린은 퇴각하는 왜군의 길을 터주자 했으나

  단 한 놈의 왜적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이순신의 굳은 결의였다.

 결국 진린이 몰래 터준 틈을 타 적선 한 척이 빠져나갔다.

 이 구원 요청으로 왜선 300여 척이 노량 앞바다에 몰려들었다.

 이순신이 봉쇄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러 온 것이다.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대 결전이 벌어졌다.

 이날 조선 수군은 불 붙은 나무나 화기를 상대 전함에 던져 불을 지르는 전투 방법을 썼고,

  왜의 대 선단은 차츰 균열되어갔다.

 도망치는 적선의 뒤를 이순신이 맹렬히 추격하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이때 이순신의 왼쪽 겨드랑이로 적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심장 근처의 치명상이었다.

 이순신은 급히 방패로 자기 앞을 가리게 했다

 적이 행여 자신의 상태를 볼까 걱정해서였다.

 선실 안으로 들어간 이순신은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의 나이 쉰넷,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왜군을 섬멸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눈을 감고만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왜선 200여 척을 격침해,

  전쟁이 벌어진 이후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싸움을 끝으로 7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렸다.


  평 가
《선조실록》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일도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폼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 제사하고 우의정을 증직했다가 6년 뒤 좌의정을 추증하면서

   덕풍부원군(德風府院君)에 봉했고,같은 해 선무 1등 공신에 책정했다.

 이후 인조 21년 충무공의 시호를 내렸고,정조 17년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당시에도 최고의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순신의 묘에는 보물로 지정된 김육이 지은 신도비와 함께

   21대 왕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다.

 우리 역사상 왕이 신하의 묘에 비문을 지어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은

  오직 여기 한군데뿐이다.

  또한 숙종은 현충사 제문에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라는 글을 남기며 이순선을 추모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이웃 나라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나라의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을 평하며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요,하늘과 해를 다시 손본 공이로다”며 극찬했고,

 일본 최고의 명장이요 군신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가

  러일전쟁에서의 승전을 축하하는 피로연 석상에서

  자기를 영국의 넬슨과 이순신에 비겨서 칭송하는 축사를 듣고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국난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한 상징이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더욱더 확고히 자리 잡았지만,

 최근에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와 전공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인간적인 결점에 대해 논의하며

  지나친 신격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