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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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물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세종대왕(世宗大王:1397-1450) 아니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을
꼽는다. 범위를 조선시대만으로 국한하지 않고 한민족 전체로 확대하더라도 그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 바로 성웅(聖雄)이라 불리는 이순신 장군인 것이다. 혹자는 지난날 군사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추앙된
위인이라는 이유로 역사의 평가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원균(元均:1540-1597)의
처지와 비교하면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권을 차지한 세력에 의해 실제 이상으로 추대되었다고도 하지만, 그런 말들은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조금만 자료를 찾아보고 사료(史料)를 대조해 보면 한낱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다. 과연 충무공 이순신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유사(有史) 이래 민족 최고의 명장(名將)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것일까?
이순신은 본관이 덕수(德水), 자(字)가 여해(汝諧)로,
1545년(인조1) 3월 초8일(양력 4월 28일)에 한성부 건천동(乾川洞:현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부(父)는 증의정부좌의정 덕연군(德淵君) 이정(李貞), 모(母)는 증정경부인 초계(草溪) 변씨(邊氏)이며, 형제는 셋인데
위로 희신(羲臣)과 요신(堯臣), 아래로 우신(禹臣)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같은 동네에서 자란 유성룡(柳成龍:1542~1607)과
절친하게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8세가 되던 1552년(명종7)에 본가가 있던 충청도 아산(牙山) 백암리(白巖里)로 이사한
후, 21세이던 1565년(명종20)에 전보성군수 방진(方震)의 딸 상주(尙州) 방씨와 혼인했다. 혼인한 이듬해 10월에 그간
정진하던 문과(文科) 학업을 중지하고 무관(武官)이 되기 위한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형(희신과 요신)을 따라 유학(儒學)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무인이 되고 싶어했다. 22세 되던 해 겨울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팔심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에 동료들이 따를 자가 없었다." -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이충무공전서)' 행록(行錄)1. 이순신의 조카, 정랑(正郞) 이분(李芬) 찬(撰) |
28세이던 1572년(선조5)에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낙방했으며,
4년 후인 무과 학업 10년째가 되는 1576년(선조9) 2월에 병자식년(丙子式年:병자년 정기)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등위는 병과(丙科) 제4인(第四人)으로 해당 무과의 전체 급제자 29명 가운데 12등이었다. 그러나 그 29명 중에
전현직 관리가 26명이나 되었으므로 등수가 크게 낮았던 것은 아니였다. 급제자 평균 연령은 이순신의 나이보다 2살 많은 34세.
과거 급제 후 수습직인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를 거쳐, 그 해 12월에 첫 정식 관직인 종9품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임명되어 함경도 국경 지역에 부임하였으며, 이후 종8품 훈련원봉사, 충청도병마절도사의 군관(軍官:개인
참모) 등을 역임했다.
1580년(선조13) 7월에 일약 승진하여 전라좌수영의 종4품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는데, 1582년 1월에 조정에서 파견된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무기검열관) 서익(徐益:1542-1587)의
보고로 인해 파직되었다. 무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실제는 이순신이 훈련원봉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병조정랑으로 있던 서익 자신의 (인사와 관련된 부당한) 지시를 들어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발포만호로 있을 때 상관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성박(成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진 영내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고 명령한 결과 일어났던 사건(이순신이 '관물(官物)' 즉 나라의 재물이라며 거절한 일)은 익히 알려져 있다.
파직된 해 5월에 훈련원봉사가 되었으며, 잠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용(李용)의
군관으로 있다가 10월에 종9품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이 되었다. 권관이 된 직후 여진족 추장 울지내(鬱只乃)를 소탕했으나,
임의 출병이라 하여 공적이 유야무야 되었다. 11월에 정7품 훈련원참군에 임명되었는데, 곧 부친상(喪)이 났으므로 관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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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같은 이는 거의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 뒤의 일인자인 격인데, 그가 영락(零落:출사 전 또는 1582년 파직)하였을 때를 당하여 동종(同宗:같은 본관)으로서의 친밀함이 겹쳐 있고 거기에 본병(本兵:인사권자)의 권한까지 겸하고 있던 현명한 선정(先正) 이문성(李文成:율곡 이이)이 그를 구하였지만 만나볼 수 없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관찰하여도 뒷날의 전공 수립을 추측하기에 충분합니다." - 1797년(정조21) 윤6월 6일(갑자), 의정부우의정 이병모(李秉模:1742-1806) |
이어 2월에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1541-1607)의 군관을 거쳐, 12월에
종6품의 정읍현감(井邑縣監)이 되었다. 현감으로 부임한 다음해인 1590년(선조22) 7월과 8월에 이순신을 종3품인
고사리진(高沙里鎭)과 만포진(滿浦鎭)의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임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조정 신하들의
반대로 곧 무산되었다. 종6품 현감을 갑자기 종3품으로 품계를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것이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의 반대 이유였다(조선시대 관직은 매우 엄격하고 신중하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품계를 몇
단계씩 뛰어 넘어 관직을 제수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이 평상시와
달랐으므로 '인재'라고 평가되는 무관들을 각급 요충지에 배치하는 등의 최소한의 전쟁 대비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순신도 1591년 2월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발탁 임명된다. 당시 조정 논의를 보면,
+ 1591년(선조24) 2월 16일(계미), 선조실록. |
과 같았다. 2월에 종4품 진도군수로 임명하는 사령장이 발급되었는데 미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수군첨절제사(加里浦水軍僉節制使)로, 이어 13일에는 무반 정3품 당상관직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품계나 관직 임명은 조선시대 내내 특히 엄중하게 시행되었으므로 전혀 논란이 없지는 않았으나, 비변사(備邊司)
실무관들의 동의와 선조(宣祖) 임금의 강경한 뜻에 따라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건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기까지 약 14개월간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나서게 된다. 실제로 1592년(선조25) 3월 27일과
전쟁 발발 하루 전인 4월 12일에 거북선(龜船)에서 포(砲) 쏘는 시험을 한 것으로 '난중일기(亂中日記)' 기록은 전하고 있다.
"27일(정해). 맑고 바람이 없었다. 아침을 일찍 먹은 후, 배를 타고 소포(召浦:여수
동쪽 경포)에 이르러 쇠사슬을 가로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며 종일토록 기둥 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放砲)을 시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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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은
갑자(甲子)로 '임진(壬辰)'이다. 이해 4월 13일에 일본군의 부산진(釜山鎭) 상륙과 점령을 시작으로 장장 7년간에 걸친
전쟁이 개시되었다. 개전 소식이 전라좌수영에 전해진 때가 15일 술시(戌時:19-21시), 이순신은
곧바로 조정에 장계(因倭警待變狀)를 올리고 이웃한 전라관찰사 이광, 전라병사 최원(崔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1561-1597), 경상우병사 김성일(金誠一:1538-1593),
경상좌수사 박홍(朴泓:1534-1593), 경상우수사 원균(元均:1540-1597) 등과
관련 공문을 주고 받았다. 26일에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主將)의 호령에 맡긴다.'는
좌부승지 민준(閔濬:1532-1613)의 서장(書狀)을 접수하였다. 익일 선전관 조명(趙銘)이
전한 명령도 같은 내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관할 영내를 넘어 출전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
이순신은 이 옥포해전의 공적으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이후 사천(泗川)에서 13척,
당포(唐浦)에서 21척, 당항포(唐項浦)에서 26척, 율포(栗浦)에서 7척을 격파하는 등의 큰 전과를 올려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階:승급)되었다(이상 제2차 출전). 그리고 7월 8일에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大捷)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그 이름도 유명한 한산도(閑山島) 해전에서 일본군 70여 척을 맞이해 학익진(鶴翼陣)으로
56척 이상을 격침하는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는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이 합심한 결과로, 이 공적으로 인해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 이 달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서 20여
척(이상 제3차 출전), 9월 1일에 부산포(釜山浦)에서 100여 척을 깨트려(제4차 출전) 조선군의 재해권 완전 장악은 불변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고 남해와 서해를 경유해 군량과 병력을 최전선으로 수송하려는 일본군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1593년(선조26) 2월과 3월에 웅포(熊浦:웅천) 일대에서
소규모 접전이 있었으나, 임진년 이후 해상 전세는 비교적 조용했다. 일본군이 극도의 저자세를 보여 일체 바다로 나와
응전하지 않았고 조선 수군 또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함부로 일본군 밀집 지역으로 진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군과
수군이 함께 병진(竝進)해야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는데, 당시 육군 전력이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선 수군 지휘관의 위계(관품)가 동일해 이들의 의견을 조정할 상급자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원활한 작전 지휘를 위해
충청, 경상, 전라의 3도 수군을 아우르는 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忠淸全羅慶尙三道水軍統制使) 직책을 신설, 1593년
8월에 이순신에게 겸직을 명했다(임명 교서를 받은 것은 10월 1일?). 통제사 이순신이 된 것이다.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密旨:비밀리에 내린 어명)가 들어왔는데 '수륙(水陸)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이고 한 가지 계책이라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지만, 3년이나 해상에 있어 그럴 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으로 날을 보내지만,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소굴(窟) 속에 있는 적이라 경솔하게 나아가 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己知彼 百戰不殆).'고 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는데, 국사(國事)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널 방책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겠는가." - 1594년(선조27) 9월 3일(무인), '난중일기' 갑오(甲午) 9월 초3일 이순신 |
1594년(선조27) 3월 4일에 제2차 당항포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군
30여 척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는 적이 소극적으로 일관하던 중에 이룩한 통제사 부임 이후 최대 전과였다.
9월과 10월에 장문포(長門浦), 영등포(永登浦) 등에서 접전이 있었으나 전과는 크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강화회담이 열리고 명(明)과 일본 사이에 가짜 항복문서와 책봉사가 오가는 등, 1595년(선조28)이 되면서
사실상 휴전(休戰) 상황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명군(明軍)과 일본군도 상당수 철군하거나 점령한 땅을 지키기
위한 수성(守城) 진지 구축에 몰입했다. 이렇게 약 3년간의 잠잠하던 기간이 지나 다시 전쟁이 속개된 것은 1597년(선조30)
2월이었다. 임진왜란 제2회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의 계략과 조선 조정의
판단 착오, 신하들 사이의 내분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1월말에 이순신은 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된다.
일본군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이 (자신은 전쟁 재발에 반대한다면서)
'화친이 성립하지 못한 것은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때문이니, 모일(某日)에
바다를 건너 상륙하려 할 때 수전(水戰)을 잘 하는 조선 수군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공격하라.'는 거짓 첩보를 조선측에
흘린 것이다. 이를 입수한 조전 조정에서 좋은 정보라고 여겨 이순신을 독려했으나 통제사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았다.
상륙지라고 알려진 서생포(西生浦)는 지금의 울산(蔚山) 지역으로 부산포를 경유해야 도달할 수 있는 원거리인 관계로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적의 첩보를 그대로 믿고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출전에 응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여기에 기망(欺罔) 장계 문제와 원균을 무고한 혐의가 추가된 결과, 선조 임금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전라도병마절도사
원균을 후임 삼도통제사 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하게 된다.
이순신은 3월 4일에 하옥되고 12일에
형문(刑問)을 받았으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탁(鄭琢:1526-1605) 등의 변호로
사형죄에서 감(減)해져 4월 1일에 생애 두 번째 백의종군형에 처해졌다. 이 달 11일에 모친상이 있었지만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1537-1599)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7월 14일 출전한 원균이 동월 15일과 16일에
벌어진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문자 그대로 '대패(大敗)'하자 조정에서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삼도통제사로
삼았다. 진주 정개산성(鼎蓋山城)에서 백의종군 도중에 7월 22일자 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받은 8월 3일 당일로
길을 떠나 수군이 머물고 있던 장흥 회령포(會寧浦)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때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고작 12척.
때문에 조정 안에서 차제에 수군을 폐지해 그 병력을 육군으로 전환하자는 의견 개진이 있었는데,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수군 전력 유지를 강력 주장하였으므로 수군 폐지론은 없던 일이 되었다.
"임진년부터 5, 6년에 이르는 동안 적이 감히 양호(兩湖:충청과
전라) 지방에 쳐들어 오지 못한 것은 주사(舟師:수군)로 그 바닷길을 막아낸
때문이옵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사옵니다. 이제 만일 주사를 모두 폐지하신다면 이는 적이 다행하게 여기는 바일 것이며, 호남 해안으로부터
한강까지 일격에 진격할 것인 즉, 이는 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고 하더라도
미신(微臣:미미한 신)이 죽지 아니한 즉, 적이 감히 우리를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 1597년(선조30) 9월, 이순신의 장계 |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겨 전열을 가다듬은 이순신은 13척(12척+1척 후속) 전선을 이끌고 출전,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일본군 200여 척을 맞이해 그 중 31척 격파하고 수십 척에 피해를 입히는 승리를 달성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함에 따라 일본군의 남해-서해를 잇는 진공 계획은 재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임진왜란 일화(逸話)에,
선조가 이순신을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려주려 하자, 신하들이 "순신의 작질(爵秩:품계)이
이미 높습니다. 이제 또 다시 올려 주면 추후 다시 승전할 때 장차 무엇으로써 상(賞)을 주시려고 하시옵니까."라는
말로 반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임금을 호송하거나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한 문관 신하들의 승진에는 거칠 것이
없었지만, 무관 장수들에 대한 승진과 포상에는 매우 냉정했던 것이 당시 조정 풍토였다. 아니 조선시대 전반이 그러했는데,
이는 전후 책봉된 공신(功臣) 규모, 문무관 비율만 헤아려 봐도 알 수 있다.
시간은 흘러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31). 수군 전력을 점차 강화한 이순신은 7월 16일에 고금도(古今島), 9월과 10월에 왜교성(倭橋城)
일대 해역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으며, 최후 후퇴를 감행하던 일본군 본진을 격멸하기 위해 11월 9일 함대를
출전시켰다. 그리고 19일에 벌어진 해전에서 일본군이 발사한 유탄을 맞은 이순신은 전사(戰死)로서 생을 마감한다(향년 54세). 노량(露梁)
해전에서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순절하고 만 것이다. 순절한 이듬해 2월 아산 금성산(錦城山) 아래 안장하였으며,
1614년(광해6) 10월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이장하였다. 1601년(선조34)에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麗水)에 이순신을
배향하기 위한 사당이 세워지고 선조로부터 충민사(忠愍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와
아산 현충사(顯忠祠)도 1663년(현종4)과 1707년(숙종23)에 각각 사액되었다.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비석에 새긴 글)을 읽었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 순절(殉節)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중국 남송의 명장)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能)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백의종군)을 받기에 이르렀고, 결국에는 원균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큰 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 1659년(효종10) 윤3월 30일(경인), 효종(孝宗) |
순절한 해 12월에 정1품 의정부우의정으로 증직되고(품계는 불명), 1604년(선조37)에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이어 7월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이 가증(加贈:추가 추증)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追封)되었다.
친공신(親功臣:스스로 공적으로 공신이 된 사람)에게 주도록 되어 있던 시호(諡號)가
내려진 것은 순절한 지 무려 45년이 지난 1643년(인조21) 3월이었다.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였는데,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 것을 '충(忠:危身奉上)',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은
것을 '무(武:折衝禦侮)'라 하였다. 최고 관직인 영의정이 가증된 것은, 사후 200년 가까이
지난 1793년(정조17) 7월 21일이었으며, 문집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가 완성 간행된 것은 1795년(정조19)
9월 14일이었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연합 작전을 수행한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은
이순신을 평하여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재주와 나라를 바로 세운 큰 공이 있다(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고
말하였으며, 이순신이 쌓은 전공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해 신종(神宗) 황제가 명 관직인 '수군도독'의 도독인(都督印:관인)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하사하기도 했다. 선조실록 권161. 선조36년 4월 21일 정미조에도 사평(史評)으로 '이순신은
재질과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 중국 사람들도 명장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그 때에도 명장으로
두루 칭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순수 무신(武臣)으로는 극히 드물게,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저명한
유현(儒賢)에게만 붙여 사용되던 '선정(先正)'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순신을 명장이라 말하는 근거에는,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그 결과 일본군의 진공 기도를 완전 분쇄시켰으며(일본군 손실 500척
이상, 조선군 전투손실 0척), 2차례 백의종군으로 대표되는 안팎의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오로지 충(忠)으로 매사
대처하였을 뿐 아니라, 인품과 덕(德)으로 동료 장수와 백성들을 화합해 잘 이끌었다는 것 등이 있다. 특히, 일본군의
전략과 전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한산도 해전과 12척 전선을 지휘해 결사적으로 싸웠던 명랑 해전에서
이룩한 '불멸의 공적'이 빛을 발하는데, 과연 이러한 승리가 없었더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참고로, 전쟁 초반의 자침(自沈)을 제외한 임진왜란 전기간의 조선 수군 손실은 120척 가량이었는데, 이
가운데 이순신 장군 지휘하에서 발생했던 손실은 비전투손실 2척에 불과했다(대부분 피해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하던 기간에 발생했다.).
"조정에서 현재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충신(忠臣)으로 드러나 칭송할 만한 이는 고(故) 통제사 이순신만한 이가 없는데도, 묘소에 아직까지 조그만 표석(表石)조차도 없습니다. 이는 자손들이 미약한 소치이니, 조정에서 본도(本道:충청도)로 하여금 세우게 한다면 풍성(風聲:품격과 명성)을 수립하는 도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1658년(효종9) 6월 11일(정축), 영돈녕부사 김육(金堉:1580-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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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다.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덕풍부원군 행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삼도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영의정을 가증하라." - 1793년(정조17) 7월 21일(임자), 정조(正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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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文廟)에 우리나라 선현(先賢)을 많이 종향(從享)하였는데, 봄과 가을의 석전(釋奠)에 관원을 차견(差遣:파견)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개 그 소중함이 성묘(聖廟:문묘)에 있기 때문입니다. 2품 이상 무신(武臣)으로 조용(調用:등용)되었다가 졸(卒:사망)하였을 경우에도 또한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제사)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 없던 것이니 비록 사묘(祠廟:사당)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제사)라고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정도에 지나친 일은 아닐 것입니다." - 1710년(숙종36) 12월 17일(정축),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이命:1658-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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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0.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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